『명랑하라 팜 파탈』 김이듬
올라가는 길인가? 올라갈 필요가 없는 여정인가?
“……숨고 싶다, 기약 없는 땅으로. 독창(獨創) 혹은 숙명(宿命)이라는 착란 속에서 단지 쓰다가 사라지고 싶다. 최선을 다해 빛나지 않으려고 애쓰는 빛나는 것들의 심정이 이러할까?”
쉽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어렵다.
‘팜므파탈(숙명의 여인)’에게 명랑하라니? 그럼 명랑하지 않다는 얘기인데 그래 대충 시집의 내용이 명랑하지 않은 건 사실이다. 그래서 ‘명랑하라’는 어법에도 맞지 않은 명령어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대충 내가 이해할 수 있었던 작품을 예로 들어보면,
1부의 「지정석」에서는 극장 안에 들어간 화자가 지정된 좌석에 앉아 느끼는 불쾌한 몽상을, 「드러머와 나」에서는 화자는 대리인으로 ‘소녀’를 내세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다른 작품의 ‘쿠마리’처럼 자신의 삶이 자의와는 상관없이 두들겨지는 드럼과 같은 숙명에서 벗어나고자 함을 이야기 하고 있다.
2부의「왼손잡이」에서는 왼손의 부정적 이미지를 그대로 드러내며 일반적이지 못한 삶의 불편함을, 「항상 엔진을 켜둘게」에서는 자아분열과 처음 혹은 마지막을, 「바싹 마른 태아를 해금으로 연주할까요」에서는 부부싸움에 놓인 아이의 노래(바람)를, 「투견」에서는 살기 위해 싸워야하는 삶을, 「합창합시다」에서는 결손 가정의 화자가 고맙지 않은 선생에 대한 기억을, 「서울 퍼포먼스」에서는 현재 서울에서 살아가며 벌어지는 일들을, 「녹색 광선」에서는 녹색 신호등처럼 세상은 끊임없이 가라고 하는데 빨리빨리 가라고 하는데 언제 빨간 신호등이 켜지는 지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
3부의 「사우나 잡념」에서는 ‘벗겨놓으면 그년이 그년이라’는 별 거 없음을, 「달리는 집」에서는 한 때 세상을 누비고 싶어했던 화자가 아직도 달리고 싶지만 약골로 집에 그냥 있음을, 「병자가 병원에 와서 죽듯이」에서는 장례식장에서 우연히 만난 노숙인 노인이 장례식장에 와서 밥을 먹고 ‘능숙하게’ 잠을 청하려다 말고 화자를 불러 행여 예견된 죽음이라도 이야기 하려는 것인지, 「어제의 만나manna」에서는 육신의 배부름을 위해 미리 준비하는 삶에 대한 안타까움을 노래하고 있다.
김이듬 그녀는 산에 올라가는 중일까? 아니면 산에 올라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면 ‘산’이라는 것 자체가 애초에 없었을까? 아니면 공부 중인가?
그녀가 물었던 말을 그녀에게 되묻고 싶다. “시는 쓸모 있기나 한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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