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詩

백석 적경

sihatogak 2008. 4. 14. 10:15
 

적경(寂境)           백  석


신살구를 잘도 먹드니 눈오는 아침

나어린 아내는 첫아들을 낳었다


인가(人家) 멀은 산(山)중에

까치는 배나무에서 즛는다


컴컴한 부엌에서는 늙은 홀아비의 시아부지가 미역국을 끓인다

그 마을의 외따른 집에서도 산국을 끓인다


  ‘나어린 아내’는 여름에 ‘신살구’를 얼마나 먹었을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예비 아빠의 마음은 어땠을까? 시아버지는 살구를 따면서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생각만 하여도 따뜻하고 행복한 그림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제는 눈 내리는 겨울 아침, 아내가 순산을 했다. 아! 그냥 순산이라 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은가? ‘첫아들’이고, 또 ‘인가 멀은 산중’에 있는 이라고는 ‘늙은 홀아비의 시아버지’와 ‘젊어 숫기 없는 남편’ 이렇게 둘밖에 없는 와중의 해산이니 그 광경을 생각해보면 눈시울이 따뜻해지지 않는가? 해산날 아침이 오기까지 두 남자는 어땠을까를 생각해보면 우습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 그야말로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하다가 허둥대기도 하다가 답답하기도 했을 것이다. 첫아이인 만큼 산통도 오래되었을 것이니 짐작할 만하다. 그리고 눈 오는 아침 어린 아내가 첫아들을 낳았다. 이 적경 속의 정황을 ‘정중동(靜中動)’이라 부르면 안 될까?

  제목 ‘적경(寂境)’은 어떤 의미일까? ‘적(寂)-고요하고 평온한’, ‘경(境)-지경 또는 곳’을 의미하니 ‘고요한 경계’나 ‘고요한 곳’을 의미하지 않을까? 그 ‘세 사람이 있던 곳’, 아니 이제 ‘네 사람이 있는 곳’이 된 그 곳 또는 산중 마을과 인가와의 먼 경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그곳에서 일어난 일과 그곳의 정경을 합쳐보면 정중동의 그림이 보이지 않을까?

  아마 인가가 가까웠다면 두 사내는 아마 소리를 지르기도 하거나 아니면 뒷짐 지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속내를 감추고 있거나 했을 것이다. 그런데 두 사내의 온 신경을 당기는 여자는 한 사내에게는 아내요, 한 사내에게는 며느리이다. 두 사내는 평상시 서로 건네는 말도 적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해산일이 되고 우왕좌왕 님비곰비 곰비님비 천방지방 지방천방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어디 물어볼 곳도 도움을 청할 곳도 없는데다 경험 있는 시어머니도 없으니 참 답답할 노릇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차저차하여 아이를 낳았으니 이 얼마나 좋을까? 밤을 샌 세 산골 사람들을 아니 네 사람을 마치 축복이라도 해주듯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까치가 울어주니 폭풍 뒤의 무지개가 이보다 밝고 빛날까?

  그리고는 급하게 두 사내는 각자의 집에서 미역국과 산국을 끓인다. ‘나어린 아내’가 해산한 곳은 시아버지의 집인지 아니면 멀리 떨어진 아들의 집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부분이 이 시의 묘미라 할 수 있다. 우리에게 맡겨진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부분이라 마음이 많이 움직인다. 어쨌든 아이를 낳았고 두 사내는 산모를 위해 정성을 다해 불을 지피고 있다. 그리고 어린 산모를 위해 어느 한쪽 집의 한 사내는 산모를 위한 정성의 온기가 식을까 노심초사 산중 다른 집으로 갈 것이다. 그것이 아들이건 아버지이건 중요하지 않다. 더불어 해산한 집이 누구의 집인가도 중요치 않다. 다만 두 사내의 동동거리는 모습과 얼굴 표정을 그려본다면, 아 얼마나 가슴 차오르는 그림이 아닌가? 두 사내는 또 얼결에 미역국과 산국을 두고 얼떨떨하고 뜨악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떠랴? 이 좋은 날에. 누구의 국부터 산모는 먹을까? 이 적경을 뭐라 일러야 좋을까? 그 아이의 이름은 또 무어라 불릴까? 두루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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