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률詩

립스틱

sihatogak 2006. 4. 24. 21:34

립스틱

 

 

 

아내 몸에 손님이 온 모양이라 생각했다

자고 일어나니 이불에 피칠이 보인다

손님은 왔는데 아니라 한다

이제 막 돌 지난 녀석간밤에 립스틱을 꺼내 피칠을 했다 한다

아내 입에도 잘 쓰이지 않는 물건인데

제 온몸을 입으로 만들어 놓고는

침대며 베개 젖병이며 방바닥

키 닿는 낮은 곳에

막대 다 닳도록 온통 귀 같은 입들을 그려 놓았다

입이 없는 것들에게 립스틱을 발라 준 녀석은

몰래 나눈 이야기의 흔적들을 채 감추지 못한 채

부지런한 아침이 어릿광대처럼 곤하다

흰 핏톨도 끊지 못한 녀석이 열어 준 붉은 입들은

내가 눈을 뜨자마자 입을 다물어 버리고

안 바르는 게 훨씬 예쁘다며

립스틱 한번 건네 준 적 없는 나는

입에 풀칠로 아내의 입을 다물게 하고는 사랑한다 했던가

녀석의 손님들이 가기 전에

귀 그려 달라 해야 할 텐데

입만 남겨두고 막대 속으로 손님들은 숨어버리고

어릿광대는 잠에서 통 깨어날 줄 모르고

하는 수 없이 어릿광대가 그려 놓은 붉은 입들에

없는 귀를 대어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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