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남은 이야기는 엎거나 묻거나 할 일
우뚝 솟아 검은 서녘 산
뒤에 숨겨놓은 컴컴한 빛
들락거리는 날짐승의 허기로 엮어 내려간
깊고 검은 구렁
숨긴 이야기 영영 잃어버리고 나면
버리든 떠나든 할 일
유리벽이 노을 번진 산을 사각사각 잘라
저녁을 차곡차곡 개키는 저녁
버리고 떠난 애인의 오늘은 어딘가
가 닿을 수 없는 오늘 저녁
벽도 벽 너머도 검붉게 젖어
떠벌리기라도 할까 크게 검게
형언할 수 없이 길어진 찰나와
떠벌려도 이르는 파국에 대해
귀에 박혀 찾을 수 없는 용기에 대해
몸을 기울여 피를 다 엎지르기라도 할까
저문 사랑의 그림자들을 빚어
길고 어둔 속눈썹으로 말아 올려놓고
크게 뜰까 깊게 감을까
대가리 살을 발라먹다 문득 서늘해져서
넋 놓고 웃든 등골로 울든
울든 웃든
다 나였으므로 내가 다였으므로
검은 산과 살을 섞어
그림자를 바를까, 다시
발라도 발라도 비린 대가리가 구렁이 되는
이 찬란한 검은 찰나를
저 검디검은 나를
지우든 찰나처럼 게 세워두든 할 일
미워할 일로 가득 텅 빈 저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