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 때문에 벌어진 일
- 백상웅 『거인을 보았다』
‘거인’을 ‘가난한 생계’라고 읽는다. 어찌해볼 수 없이 붙어 있는 그러나 보이지 않는 가난, 나라님도 구제를 못하는 가난은 분명 거인이다. 어쩌지 못하는 거대한 그 거인은 시집 여기저기서 몸 바꿔 출몰한다. 괴물로 짐승으로 놈으로 상징화되기도 하고 슬픈 사람으로 북받친 사람으로 구체화되어 등장하기도 하며 다양한 시적 상황에서 이지러진 얼굴을 내민다. ‘밥상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하기에는’ 좀 뭣하지만, 시집의 전반적인 시적 상황은 밥상 때문이다. 먹고 사는 일이 해결되지 않아서 ‘~라고 하기에는’ 화자 스스로도 민망하고 멋쩍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무언가 우리가 굴려갈 더 큰 게 있을 것이라 믿었을 터인데, 실상은 가난한 생계라는 줄에 묶여 뱅뱅 돌고 있는 것이다.
그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은 대물림되고 있다. “청춘은 아픔과 슬픔 따위를 고용승계한다”고 시인은 말한다. 괴물, 짐승, 놈 등은 주어진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을뿐더러 불법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화자는 꽃이 필 무렵에도 꽃 피우지 않는다. 천만 명의 사람이 사는 대도시로 전입을 한들 피울 꽃이 없다. 이유는 “울림이 없고 벽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화자는 태업을 한다. “밥을 축내다가 변기에 앉을 때 / 힘은 그때 쓰고 되도록 멍해지겠소.”라고 그 자리에 앉고 만다. 왜냐하면 “살아남는 자만이 살아남는 자”라는 쓰리고 먹먹한 체감이 살아온 동안 배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한 일이란 “터널을 뚫은 일”이다. 아버지가 뚫어 놓은 터널을 나가면 봄날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터널을 통과하니 폭설이다” 그러므로 화자에게는 “아버지는 갇히기 위해 평생을 전전긍긍하면 살”아 온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나마 자조적으로 위안을 삼는 방편으로 “물렁해지는 시간”을 선택해보지만 눅눅한 시간일 뿐이다. 어머니의 무릎이 이지러지는 것처럼.
조물주가 만든 삼라만상의 각자들은 다들 제자리가 있고, 제집이 있다. 다만 사람은 좀 다르다. 물론 다들 좋던 싫던 머무는 곳이 있다. 다른 것은 문패의 유무이다. 다시 말해 소유의 문제이고 나아가 소유한 집채의 수의 문제이고 소유하려는 기간의 문제가 다른 각자들과는 좀 다른 문제로 다가선다. 어디 세상을 굴려가는 더 큰 무엇이 있다고 치더라도 당장의 생활이 유지되지 않은 다음에야 어찌 천박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장마’ 같은 “분열과 통합의 반복”이 정치나 종교에서 조차 부조리하게 지속되고 있는 현실은 시인이 견디기 불편했을 것이다.
이런 세상이 늘 이런 식으로 굴러갈 것만 같은 느낌은 매우 단단하게 굳어 있다. 다만 가끔씩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갖는 때도 있다. 뭐 큰 것도 아니다. 게으름 피우지 않고 먹고 살려고 뼈가 빠지도록 어떤 업에 종사한다면 적어도 삼시세끼는 먹고 아프면 병원은 가고 최소한의 교육은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거기에 집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고, 집이 없더라도 꼬박꼬박 월세를 낼 정도라면 무언가 큰 걸 생각할만한 시간이 생기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올 한 해 귀가 많이 느껴지던 해였다. 힘들었다. 더불어 나라가 많이 느껴지던 해이기도 했다. 애국자가 된 기분이라 너무 불편하고 힘들었다. 띵가 띵가 놀지 못해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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