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가 오면
유희경
그렇게, 네가 있구나 하면 나는 빨래를 털어 널고 담배를 피우다 말고 이불 구석구석을 살펴본 그대로 나는 앉아 있고 종일 기우는 해를 따라서 조금씩 고개를 틀고 틀다가 가만히 귀를 기울여 오는 방향으로 발꿈치를 들기도 하고 두 팔을 살짝 들었다가 놓는 너가 아니 너와 비슷한 모양으로라도 오면 나는 펼쳤다가 내려놓는 형편없는 독서 그때 나는 어떤 손짓으로 어떻게 웃어야 슬퍼야 가장 예쁠까 생각하고 그렇게 나, 나, 나를 날개처럼 접어놓는 너 너 너의짓들 너머로 어깨가 쏟아질 듯 멈춰놓는 모습 그대로 아니 그대로, 멈춰서 멈추길 멈췄으면 다시처럼 떠올려 무수히 많은 다시 다시와 같이 나를 놓고 앉아 있었으면 나를 눕히고 누웠으면 그렇게 가만히 엿보고 만지고 아무것도 없는 세계의 밋밋한 한 곳을 가리키듯 막막함이 그려져 손으로 따라 걸어 들어가면 그대로 너를 걸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숨이 타오름이 재가 된 질식이 딱딱하게 그저 딱딱하게만 느껴지는 그건 너가 아니고 기실, 나는 네 눈 뒤에 서 있어서 도저히 보이질 않는 너라는 미로를 폭우 쏟아져 내리는 오후처럼 기다려 이를 깨물고 하얗게 질릴 때까지 꽉 물고 어떻게든 그러므로, 너로부터 기어이 너가 오고
'좋은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재학 '흰뺨검둥오리' (0) | 2013.03.27 |
---|---|
김광규 「영산(靈山)」 (0) | 2013.03.12 |
신동엽 「좋은 言語」 (0) | 2010.05.18 |
김수영 <엔카운터지> (0) | 2010.05.12 |
「어느 늙은 水夫의 告白」 - 서정주 (0) | 2010.0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