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롱불
김상훈
석유를 그득히 부은 등잔은
밤이 깊도록 홰가 났다
끄으름을 까-맣게 들어마시며
노인들의 이야기는 죽구 싶다는 말 뿐이다
쓸만한 젊은 것은 잡혀가고
기운 센 아이들 노름판으로 가고
애당초 누구를 위한 농사냐고
이박사의 이름을 잊으려 애썼다
곳집에 도적이 들었다는
흉한 소문이 대수롭지 않다
삼백석이 넘어 쌓여 있다는 곡식이
그들의 아들이 굶어 죽는데는
아무 소용이 없었던 까닭이다
암탉이 알을 낳지 않고
술집이 또 하나 늘었고
손주 며느리 낙태를 했다고
등잔에 하소해 보는 집집마다의 늙은이
잠들면 악한 꿈을 꾸겠기에
짚신을 삼아 팔아서라도
부지런히 석유만은 사 왔다
잠들 수 없는 시대
이용악의 <낡은 집>에 등장하는 ‘이웃 늙은이들’은 털보네 일가가 갔을 법한 곳을 짚는다. 그곳은 ‘무서운 곳’이다. 세월이 흐른 후, 그 늙은이들은 김상훈의 눈에 들어온다. 그들은 짚신을 팔아 사온 석유로 호롱불을 밤새 밝혀가며 한 집에 모여 ‘죽구 싶다’는 이야기들을 한다. 이유인즉슨, 일제 식민지 시기 좌우익 민족해방운동세력의 가장 중요한 정강 정책으로 등장했던 '토지의 전면적 개혁과 국유화' 안이 해방 이후 미군정 기간 동안 결국 일본인 소유 토지만을 처리한 채 이승만 정권에게 넘겨지게 되는데, 결국은 실효성 없는 농지개혁에 머물고 만다. 이에 민중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가고, 그래서 그들은 “이박사의 이름을 잊으려” 애쓴다. 그 시대의 민중들은 잡혀가고, 한탕주의에 빠지고, 아들이 굶어죽는 걸 무력하게 쳐다봐야 하며, 외상술로 세월을 보내거나, 생명력이 소진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잠들면 무서운 꿈을 꾸기에 석유를 사와 호롱불을 밝힌다. 호롱불이 희망이 될 수 없는 잠들 수 없는 그 시대는 가고, 그 땅위에 호롱불 대신 촛불이 밝혀지고 있다. 그나마 화재의 위험이란 명분 아래 몇 개의 촛불마저 꺼지는 시대에 우리는 당도해 있다.
'좋은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수영 <엔카운터지> (0) | 2010.05.12 |
---|---|
「어느 늙은 水夫의 告白」 - 서정주 (0) | 2010.04.21 |
임화 - 골프장 (0) | 2010.04.06 |
임화 - 「구름은 나의 종복(從僕)이다」 (0) | 2010.04.06 |
오장환 - <소> (0) | 2010.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