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blog.naver.com/inmoonwriting/221093446097
『신체 없는 기관』 : 지젝은 왜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를 ‘신체 없는 기관’으로 뒤집는가?
‘기관 없는 신체’와 이를 뒤집는 ‘신체 없는 기관’이라는 알쏭달쏭한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기관 없는 신체’는 우리가 살펴볼 들뢰즈가 한 말이고 ‘신체 없는 기관’은 슬라보예 지젝이 한 말이다. 그렇다면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라는 개념을 ‘신체 없는 기관’으로 지젝이 뒤집는 것은 들뢰즈의 철학을 지젝이 비판하고자 함을 눈치 챌 수 있다. 우리는 위에서 스피노자가 자연을 힘으로 파악했음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힘을 상징하는 것이 기계라고 했음도 다뤘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생각을 들뢰즈는 이어받는다. 따라서 ‘기관 없는 신체’란 신체를 기계로 보는 관점이다.
신체를 기계로 본다 함은 신체의 각 부분들이 유기체라는 전체 기관의 부분이 되어 전체가 잘 돌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봉사한다는 전통적인 유기체적 신체 이론을 비판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신체 각 부분을 독립적으로 절단된 것으로 본다. 이러할 때 신체 각 부분은 그 고유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체 유기체의 일부분으로 기능할 때 신체의 각 부분은 본래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체가 왜곡됨으로써 인간은 왜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기체의 전체로서 신체를 규정할 때 특정 신체 부위인 머리가 중요하고 나머지 부분은 폄하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겐 정말 기관이 없는가? 도대체 기관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 우리는 기관 없는 신체를 좀더 신중하게 정의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기관 없는 신체는 기관에 반대된다기보다는 우리가 유기체라고 부르는 기관들의 유기체화에 더 반대된다. […] 유기체란 생명이 아니라 생명을 가두고 있는 것이다.” 즉 기관 없는 신체란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기관들이 없다기보다 이 기관들이 미리 유기적으로 질서 잡혀 있지 않다는 뜻이다.
들뢰즈는 신체를 한정되고 제한된 기능을 수행하는 유기체의 기관이 아니라 신체가 접속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또 다른 형태의 생산 및 산출을 가능하게 하는 기계로 규정한다. 기계가 접속과 흐름을 통해 생산하고 산출한다는 것을 예를 들어 살펴보자. 컵이 물과 접속하면 식수-기계이고 꽃과 접속하면 화분-기계이고 아이와 접속하면 중국 노동자-기계가 된다. 입이 음식과 접속하면 먹는 입 기계가 되고 말과 접속하면 말하는 입기계가 되고 성기와 접속하면 섹스 기계가 된다.
들뢰즈는 ‘철학’이란 개념을 만들고 개념을 사유하며 개념을 해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데카르트 이래 철학을 지배한 주체라는 개념을 해체하기 위하여 기계라는 개념을 창조했다. 그래서 들뢰즈는 ‘욕망 자체’와 같은 주체의 혐의가 짙은 것은 존재하지 않고 욕망하는 기계들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본다. 이처럼 욕망을 욕망하는 기계로서 새롭게 규정한다는 것은 주체 철학처럼 신체를 사물과 같은 가치 없는 것으로 보지 않고 욕망을 흐름과 생산 행위라는 긍정적인 힘으로 재 전유함을 의미한다.
들뢰즈가 말하는 ‘욕망하는 기계’는 하나로 통일되지 않은 충동들의 측면을 그 중요한 성격으로 갖고 있기에 이 같은 들뢰즈의 신체관은 충동들을 통일적인 유기체를 구성하는 신체의 부위들의 충동들로 보는 전통적 신체관인 주체 철학적 관점이라기보다는 ‘기관들 없는 신체’로서 신체를 재 전유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과히 사유 혁명이라고 불릴 만한 파격적인 욕망 이론이자 신체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들뢰즈는 부분적 또는 파편적 충동인 기계로 신체를 재 전유한다. 부분적 대상들을 추구하는 기관 없는 신체들은 우연한 형성체들이다. 이처럼 들뢰즈가 부분적 대상들인 기계로 재전유하는 ‘기관들 없는 신체’는 목적론적인 신체관을 토대로 하는 유기체적인 기관에 대립한 개념이다.
이러한 들뢰즈의 생각은 지성이라는 사유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온 기존의 주체 철학을 비판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따라서 들뢰즈의 독창성은 전통 주체 철학의 지성 위주의 사고방식으로 마름질된 목적론적이고 유기체적 신체관을 거부하고 해체를 시도한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유기체라는 전체로 구성된 기관으로 신체를 본다는 것은 어떻게 신체를 보는 것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인간의 형상을 말한다. 머리와 몸통과 다리라는 사지를 갖고 있는 몸을 말한다. 이런 사지의 형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신체를 보는 것이 인격적이고 개체적으로 신체를 보는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는 신체를 사지를 절단하여 볼 것을 주문한다. 그래서 들뢰즈가 보는 신체를 비인격적이고 전(前)개체적인 방식이라고 한다.
들뢰즈처럼 신체를 본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프란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다. 들뢰즈는 『감각의 논리』라는 책에서 프란시스 베이컨을 상세하게 다룬다. 그렇다면 들뢰즈가 신체를 비인격적이고 전개체적인 것으로 보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스피노자를 설명할 때 말한 것처럼 근원적 힘의 차원이 무엇인지 밝혀 보고자 함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차원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부분에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들뢰즈의 생각에 단초를 제공한 철학자가 하이데거이다. 하이데거는 전통 철학이 있는 것(존재자)의 해명에만 관심을 가졌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은폐된 부분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하이데거의 생각에서 들뢰즈는 영감을 받는다. 그래서 신체의 보이는 영역 밑의 심층인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깊숙이 내려간다.
이 보이지 않은 심층의 영역은 그야말로 힘과 힘들이 득실댄다. 들뢰즈는 이러한 심층의 영역을 잠재성의 장(場), 곧 내재의 평면이라고 명명한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처럼 이 잠재성의 장 곧 내재의 평면은 사지로 분화되기 이전의 형상을 알아볼 수 없는 미분화의 영역이다. 신체의 각 부분이 사지로 분화되기 전이므로 괴물스럽고 흉측하다.
들뢰즈는 이러한 미분화된 신체의 각 부분들이 분화되기 이전의 잠재성의 장인 내재의 평면에서 가치의 선별도 없는 무구별의 평등함을 본다. 이러한 무구별의 장에서야 말로 차이가 본래의 차이인 생성에만 복무한다. 구별에 전거하는 유기체적 사지의 장에서는 귀한 신체와 천한 신체의 구별이 본래적 차이를 대신하다. 좋은 신체란 좋은 혈통의 신체이고 천한 몸종의 신체는 폄하된다. 신체는 신분의 차이로 나타난다. 모두 사지를 가지고 태어나지만 귀한 신체와 천한 신체의 차이가 생긴다.
이런 차이를 들뢰즈는 종차 즉 유(類)적 차이라고 한다. 유적 차이는 예를 들면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같이 인간을 이성을 가진 차이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다. 이성이란 유(類)의 차이에 따라 인간을 줄 세우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전통적 사고방식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그래서 유적 차이를 없애려고 볼 수 없는 영역인 심층의 저 깊숙한 내재의 평면의 잠생성의 장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곳에슨 이성의 유무로 인간을 평가하는 차이 대신 무구별의 평등성만이 생성한다.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에는 전통 철학을 도발하려는 급진적인 내용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에 맞서 지젝은 ‘신체 없는 기관’을 개념화한다.
남근을 나의 존재의 생명력과 나의 원기왕성함 등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기관이 아니라 정확히 말해 왕이나 판사가 표장을 걸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내가 걸치는 그러한 표장, 가면으로 생각해야 한다. 남근은 내가 걸치고, 내 신체에 부착되지만 결코 내 신체의 ‘유기적 일부’가 되지 않는, 즉 비통합적인, 과잉적인 보통으로 영원히 튀어나와 있는 ‘신체 없는 기관’이다.
따라서 ‘상징적 거세’는 우리를 우리의 신체적 현실에 결박하기는커녕 이러한 현실을 ‘초월’하고 비물질적 생성의 공간으로 진입할 수 있는 우리의 바로 그 능력을 유지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고양이의 신체가 사라질 때 그 스스로 살아남은 자율적 미소 또한 신체에서 ‘거세된’ 잘려진 기관을 나타내지 않은가? 그렇다면 거세의 기표로서의 남근 그 자체가 그와 같은 신체 없는 기관을 나타낸다면 어찌할 것인가?
“생산적 생성의 장소에 해당하는 잠재적인 것과 불모적인 의미-사건의 장소에 해당하는 잠재적인 것의 대립, 이는 동시에 ‘기관 없는 신체’와 ‘신체 없는 기관’의 대립이지 않은가? 한편으로 순수 생성의 생산적 흐름은, 아직 구조화되거나 기능적 기관들로 결정되지 않은 신체이지 않은가? 다른 한편으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체셔 고양이의 신체가 더 이상 현존하지 않을 때조차 홀로 존속하는 웃음처럼, 신체 안에 삽입된 상태로부터 추출된 순수 정서의 잠재성이지 않은가?” “고양이는 ‘좋아’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공양이가 아주 서서히 사라졌다. 이 과정은 꼬리 끝에서 시작해서 웃음으로 끝을 맺었는데, 그 웃음은 고양이의 나머지 부분이 사라진 이후에도 얼마간 남아 있었다. ‘그래, 웃음이 없는 고양이는 종종 본 적이 있어.’ 앨리스는 생각했다. ‘하지만 고양이 없는 웃음이라니! 내 생애에 본 것 중 가장 신기하군!’”
들뢰즈는 라캉의 상징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라캉의 상징계는 인격적이고 개체적인 볼 수 있는 사지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가 비인격적이고 전개체적인 사지 이전임을 감안할 때 지젝은 라캉을 전통에 가까운 사상가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라캉의 삼항조의 중심인 상징계가 허물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야말로 라캉의 이론체계 전체가 흔들리게 된다. 라캉주의자로서 지젝이 이를 두고 볼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지젝은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를 뒤집는다. 그리고 ‘신체 없는 기관’으로 들뢰즈를 비판한다. 그렇다면 지젝의 ‘신체 없는 기관’은 들뢰즈가 인정하기를 거부한 라캉의 상징계인 것이지 않겠는가? 그렇다. 바로 상징계를 지젝 식의 예의 비틀기로 표현한 것이 바로 ‘신체 없는 기관’이다.
상징계가 무엇인가? 본래적 자기 대신에 누구의 아들과 손자, 회사의 누구라는 자리의 구조이지 않은가? 왕은 자연인 누구누구이기 때문에 권위를 갖지 않는다. 신체를가진 개인은 거세되고 왕을 상징하는 의복과 홀 때문에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다. 이것을 상징적 거세라고 한다. 그렇다면 신하들로 인해 왕의 권위가 생기는데 신하들은 왜 왕 자신이 스스로 권위를 갖는다고 믿는 것일까? 지젝은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루이 14세와 같은 절대 군주가 신하는 물론 국민들에게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같은 상징계에서 작동하는 믿음(이데올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징계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적 믿음 곧 신체 없는 기관은 인간의 삶과 분리불가능하다고 지젝은 본다. 그래서 기관 없는 신체로서 상징계를 인정하지 않는 들뢰즈를 지젝은 신체 없는 기관 곧 상징계의 인간 삶에 분리 불가능함을 들어 논파하는 것이다. 들뢰즈가 보는 세상은 우리와 같은 범인들이 보는 세상과 다르다. 들뢰즈는 우리가 사지가 멀쩡하게 붙어 있는 신체를 보는 곳에서 사지가 찢겨 이리 저리 나뒹구는 절단된 기계로서의 신체를 본다. 언어의 세계의 틈에서 보는 원초적 사물은 이런 모습일 것이다. 헤겔이 세계의 밤이라고 묘사한 희번덕이는 유령이 출몰하는 광기의 세계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인간은 이런 밤, 즉 모든 것을 단순한 상태로 포함하고 있는 이 텅 빈 무이다. 무수히 많은 표상들, 이미지들이 풍부하게 있지만, 이들 중 어느 것도 곧장 인간에게 속해 있지 않다. 이런 밤, 여기 실존하는 자연의 내부, 순수 자기(self)는 환영적 표상들 속에서 주변이 온통 밤이며, 그때 이쪽에선 피 흘리는 머리가, 저쪽에선 또 다른 흰 유령이 갑자기 튀어나왔다가 또 그렇게 사라진다. 무시무시해지는 한밤이 깊어가도록 인간의 눈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이 밤을 목격한다.”
헤겔이 ‘세계의 밤’이라고 부르는 이 공간은 들뢰즈의 잠재성의 장인 내재의 평면과 공명한다. 또한 라캉의 실재계의 자리이기도 하다. 세계의 밤에는 신체가 유기체로 통일되지 않고 부분 기계로 절단되어 있다. 따라서 이 공간은 무한한 창조의 공간이다. 이 텅 빈 공간에서 우리는 ‘피 흐르는 머리’와 ‘하얀 유령’을 발견할 수 있다. 이 ‘피 흐르는 머리’와 ‘하얀 유령’이 출몰하는 무의 영역이 바로 들뢰즈가 말하는 잠재성의 장인 내재의 평면이자 라탕이 말하는 실재에 가까운 지형이지 않을까?
들뢰즈는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커진다’는 명제에서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공존함을 추론한다. 커진다는 사태는 현재의 상태가 아니다. 크지 않은 상태에서 커진다는 사태이기도 한고 커진 것이 다시 작은 것이 되는 사태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사태는 현재라는 고정된 시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사태에서 고정된 큼이라는 현재는 없고 단지 작은 것이 커지고 동시에 커진 것이 작아지는 흐름만이 존재한다. 현재라고 하는 것은 이미 과거가 되고 과거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다. 이 사태에서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는 착각의 존재 사태인 것이다. 그래서 ‘앨리스카 커진다’의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얽히고설킨 잠재성의 장의 세계가 들뢰즈가 말하고자 하는 내재의 평면은 아닐까?
-https://blog.naver.com/inmoonwriting/221093446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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