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포트

<타자의 추방> - 한병철

sihatogak 2017. 8. 31. 14:55

요약 발췌본


타자의 추방- 한병철

 

같은 것의 테러

같은 것의 창궐은 박탈이나 금지가 아니라 과잉소통과 과잉소비가, 배제와 부정이 아니라 허용과 긍정이 사회체를 병들게 한다. 파괴적인 압박은 타자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온다.

타자의 추방은 아주 다른 파괴 과정을, 즉 자기파괴를 작동시킨다. 같은 것의 폭력은 그 긍정성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다. 같은 것의 창궐은 스스로를 성장으로 제시한다.(학력위주의 사회, 명품 소비의 유행, 자본의 팽창(부자되세요, 사교육 열풍 등)

같은 것의 창궐은 악성종양이 아니라 혼수상태처럼 작동한다. 언제나 같은 것을 섭취하고 소비가축처럼 살이 찐다. 감염은 타자의 부정성에 의해 일어난다. 타자는 동일자 내부로 침투하여 항체가 형성되도록 하는 반면, 경색은 같은 것의 과잉, 시스템의 비만으로 인해 일어나는 과지방적이다.(SNS를 통한 소통의 과잉)

동일자는 같은 것과 동일하지 않고 언제나 타자와 쌍을 이루어 등장하지만, 같은 것은 형태 없는 덩어리로 창궐한다. 차이를 생각할 때만 동일자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자아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끊임없이 변한다. 키도 자라고, 생각도 변한다. 그러나 오늘의 나는 분명 어제의 나와 동일한 나이다. 그러므로 같은 속의 다름’(레비나스)을 의미한다.

경험의 본질은 고통이다. 그러나 같은 것은 고통을 주지 않는다. 오늘날 고통은 같은 것을 지속시키는 좋아요에 밀려난다.(Slow Food vs Fest Food)

사유

계산

아주 다른 것으로 진입할 수 있다

같은 것의 무한한 반복

같은 것을 중단시킬 수 있다

어떤 새로운 상태도 낳을 수 없다

사건성을 지닌다

사건을 모른다

아우라 멂의 현상(외경심)

흔적 가까움의 현상(‘좋아요’)

사건에는 부정성이 내재한다. 사건은 현실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새로운 세계를, 있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낳는다. 진정한 공명은 타자의 가까움을 전제로 한다. 가까움에는 그 변증법적인 상대방으로서 멂이 새겨져 있다. 멂의 제거는 가까움을 키우지 않고, 오히려 가까움을 파괴한다. 가까움 대신 완전한 무간격이 생겨난다. 사물들이 그 대립물, 즉 타자에 의해 활력을 얻는다. 디지털 투명사회는 세계의 아우라를 없애고, 신비를 없앤다. 포르노영상의 일반적인 기법인 과잉근접과 과잉조명은 모든 아우라적인 멂, 에로틱한 것의 핵심인 멂을 파괴하여 타자를 부재시킨다. 포르노에서는 모든 몸이 똑같다. 벌거벗은 육체를 가지고 유희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상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실망과 고통에서 유희가 싹튼다. 자율에는 얼마간의 억압이 섞여 있듯이...

 

세계적인 폭력과 테러리즘

세계화는 모든 것을 서로 교환할 수 있는 것, 비교할 수 있는 것으로, 따라서 같은 것으로 만드는 폭력적인 힘이 있다. 전면적인 같게-만들기는 궁극적으로 의미의 소멸을 낳는다. 의미는 비교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같은 것이 같은 것과 만나는 지점에서 세계적인 것은 최고 속도에 도달한다.(Samsung vs Apple smart phone 소통의 과잉 소통의 부재)

세계적인 것의 테러 자체가 테러리즘을 낳는다. 세계적인 것에 맞서는 단독적인 것의 저항이 테러리즘이다. 서로가 서로의 조건인 동전의 양면처럼 말이다. 어떤 교환도 거부하는 죽음은 단독적인 것 그 자체다.(예수, 부처)

같은 것을 전체화하는 세계적인 것의 지배적인 질서 안에는 사실상 같은 다른 것 혹은 다른 같은 것밖에 없다. 외국인에게 적대적인 대중은 북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반감을 느끼지만, 바로 이 대중이 북아프리카로 패키지여행을 떠난다.(돈을 버는 이유, 여가를 위해 출근)

신자유주의는 자신을 자유로 내세우지만, 이 자유는 광고다. 세계적인 것은 오늘날 보편적 가치들까지 잠식하고 있다. 그 결과 자유 자체가 착취당한다. 세계적인 것의 폭력은 실제의 세계 전쟁처럼 사망자들과 난민들을 만들어낸다. 상업정신이 강요하는 평화는 한시적일 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제한되어 있다. 환대는 자기 자신에 도달한 보편적 이성의 가장 높은 표현이다. 친절함은 자유를 의미한다. 이방인에 대한 적대성은 증오이며 추하다. 이 적대성은 보편적 이성의 결여를, 사회가 여전히 화해되지 않은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다. 화해는 친절함을 뜻한다.

 

진정성의 테러

진정성

아토포스

나르시즘적 주체

에로스적 주체

기계되기(비고유성)

타자되기(고유성)

신자유주의적 생산 형태(판매 논리)

비교할 수 없고 단독적이다

비교 가능성을 전제

진정한 사람은 타인들과 다르다

비교할 수 없는 존재

타인들과 다른 모든 사람들과도 다르다

타자를 보지 못한다(타인의 소멸)

자아는 자신 안에서 익사한다

유기체에 활기를 부여

타인에 직면할 때 비로소 자아 형성

같음은 다름을 관통하여 계속 자신을 고수한다. 나는 타인이 나를 만질 때야 비로소 이 만짐을 거쳐 나를 만지고, 나를 느낀다.(응시, 최승호 북어) 사람은 갈등을 처리하는 작업을 하는 가운데 성장하고 성숙한다.(에로스) 생채기를 내는 행위는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갈등 처리 과정 없이, 누적된 파괴적 긴장을 신속하게 완화시켜준다는 점에서 유혹적이다.(나르시스)

셀카 중독도 자기애(에로스)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 셀카 중독은 공허감을 강화한다. 셀카는 공허한 자아를 잠시 동안 은폐하는 매끄러운 표면이다. 그러나 셀카를 뒤집으면 피가 흐르는 상처들로 가득한 뒷면을 보게 된다. 셀카의 뒷면은 상처들이다. 자살테러는 자기공격과 타인공격, 자기생산과 자기파괴가 하나로 겹쳐진 역설적인 행위이자 더 높은 차원의 공격성일 것이다. 테러리스트는 폭탄들이 매달린 허리띠를 차고 있는 나르시스다.

 

두려움

낯선 것, 섬뜩한 것,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두려움을 낳는다.(타자) 두려움에 휩싸인 현존재는 섬뜩한 것에 직면한다.(응시, “내가 너야”) 익숙한 이해 지평의 붕괴는 두려움을 낳는다. 두려움 속에서 비로소 현존재에게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의 길이 열린다.

잡다함은 소비할 수 있게 만든 다름이다. 잡다함(가상적이고 피상적인 다양성)으로 인해 우리는 같은 것의 체계적인 폭력을 인식하지 못한다. 다양성과 선택 가능성은 실제로는 없는 다름이 있는 것처럼 느끼도록 한다.

획일성(세인(世人))

고유성(타자)

일상의 질서(긍정적인 것)

일상성의 붕괴(부정적인 것)

생각들과 선택지의 잡다함(외부지향)

섬뜩한 타자와 직면하기(내부지향)

가상적피상적 다양성, 실패와 좌절과 배척에 대한 두려움(수평적 두려움)

전적인 타자, 섬뜩한 것, 무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수직적 두려움)

다름의 진정성(비교가능성)

아토포스(비교할 수 없는 존재)

소비할 수 있게 만든 다름(선택가능성)

죽음(심연과 비밀의 부정성)

건강한 것의 창궐은 비만한 몸의 창궐처럼 외설적이다. 삶을 위해 죽음을 부정하면, 삶 자체가 파괴적인 것으로 바뀐다. 삶은 자기파괴적으로 된다. 정신은 부정적인 것을 똑바로 쳐다보고 부정적인 것의 곁에 머무를 때만 이 힘(활력)이 될 수 있다. 긍정적인 것을 고수하면 같은 것만 재생산된다. 두려움(타자)을 통과할 때만 우리는 존재의 내재성의 차원에 도달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이런 상태를 존재망각이라 부른다. 존재의 저 내재성의 차원은 순결하며, 아직 이름이 없다.

개인들에게 부담을 주고 개인들을 망가뜨리는 것은 객관적인 상황이 아니라 주요한 타인들과 비교할 때 내가 뒤진다는 느낌이다.(“남부럽지 않게 살아라.”)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과 고유한 자기존재를 택할 결단을 내린 현존재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를 지향한다. 내부 지향은 타인과의 영구적인 비교를 필요 없게 만드는 반면, 외부 지향적인 인간은 이런 비교를 강요받는다.

오늘날 우리는 생산성을 제고하기 위해 신자유주의 시스템 속에서 두려움과 불안을 낳으며 살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인간을 홀로 고립된 자기 자신의 경영자들로 개별화한다. 탈연대화와 전면적인 경쟁이 초래하는 개별화는 두려움을 낳는다. 신자유주의의 기만적인 논리는 이렇게 주장한다. 두려움이 생산성을 높인다.

 

문턱

변신의 장소로서 문턱은 고통을 준다. 문턱에는 고통의 부정성이 내재한다. 문턱에는 항상 죽음이 새겨져 있다. 이 통과의례에서 우리는 한 번 죽고, 문턱의 저편에서 다시 태어난다. 문턱의 고통을 느낀 너는 관광객이 아니다. 네게는 이행(移行)이 일어난다. 하지만 문턱이 많은 이행은 오늘날 문턱이 없는 통로에 밀려난다. 인터넷 속에서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관광객이다. 관광객은 같은 것의 지옥을 여행한다.

새로운 생산 형태로서의 디지털 소통은 자신을 가속화하기 위해 모든 거리를 철저히 제거한다. 디지털 과잉조명과 노출은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도함으로 인한 잠재적인 두려움을 낳는다. 같은 것의 투명한 지옥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계속 강화되어가는 같은 것의 소음은 두려움을 안겨주기 때문이다.(나만 뒤처지는 게 아닐까?)

 

소외

인간은 세계에 대해 이방인이며, 인간들 사이에서 이방인이며, 나아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이방인이다.

침묵은 언어지만, 과잉소통은 그렇지 않다. 노동자는 더 많은 재화를 생산할수록 더 빈곤해진다.(노동 상품 소비 // 노동자 상품 소비자 // 노동자=소비자 // 욕망) 노동자는 자신의 삶을 대상 속에 투여한다. 그러나 이제 그의 삶은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니라 대상의 것이 된다.(자발적 노예, 자기 스스로를 착취, 성공, 타자의 시선) 나는 나를 실현한다는 믿음 속에서 자발적으로 나 스스로를 착취한다. 지배는 자유와 일치하는 순간, 완성된다. 이 체감상의 자유는 모든 저항, 모든 혁명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정점에 올랐을 때, 나는 자유롭다고 체감하지만 그 구도가 무너지면 그 체감상의 자유는 가뭇없이 사라지고 만다.) 즉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되어 결국 우리는 자신의 몸을 더 이상 감지할 수 없게 된다.

 

반체(反體)

객체는 무엇보다도 반대다. 나에게 대립하는 것, 나를 향해 던져지고 내게 맞서는 것, 나를 거역하는 것, 내게 반대하고 저항하는 것, 이것이 객체의 부정성이다. 소비 대상으로서의 상품은 내게 다정히 밀착하고, 내 마음에 들고, 내가 좋아요라고 말하도록 만들고자 한다. 오늘날의 지각에는 반대와 대립이 빠져 있다.

디지털적인 것에는 우리를 짓누르는 무거움이 없다. 디지털적인 것은 반항적이고 완강하고 거역하는 상대로 등장하지 않는다. ‘좋아요는 지각의 절대적인 소멸 단계이지만, 객체는 사물의 묵직함으로 세상의 무게를 만들어낸다. 이 묵직함이 반체다. 디지털 객체는 더 이상

오비케레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짓누르지 않고 저항하지 않는다. 반대의 부재는 자기침식을 낳는다.

 

시선

자신을 바라보는 눈 속에서 자신을 보는 것, 눈의 주권성을 포기하고 타자의 시선에 자신을 내맡기는 경험.

사물은 틀에서, 상징적 질서에서 벗어나 눈에 띄는 얼룩이자 세부(細部). 사물은 나를 쳐다보는 전적인 타자다. 그래서 사물은 두려움을 낳는다. 세계는 시선이다. 오늘날 세계에는 시선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주시된다거나 어떤 시선에 내맡겨져 있다는 느낌을 거의 받지 않는다. 세계는 우리의 마음에 들고자 하는 눈요기로 나타난다. 윈도우Window는 시선 없는 창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시선으로부터 차단한다.

편집증

우울증

타자의 부정성과 결부

나는 감시당하고 있어.”

시선 없는 공간

아무도 날 거들떠보지 않아.”

판옵티콘은 보기와 보이기라는 쌍을 분리시키기 위한 기계다. 억압은 시선으로 나타난다. 시선의 지배는 중앙원근법적이다. 디지털 판옵티콘은 원근법 없이 작동한다. 억압적인 시선이 사라짐에 따라 기만적인 자유의 감정이 생겨난다. 디지털 판옵티콘은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착취한다.(인터넷 서핑, 스마트폰)

 

음성

음성은 다른 곳으로부터, 바깥으로부터, 타자로부터 온다. 타자의 음성은 창궐하는 에고에 튕겨 떨어진다. 자신에 대한 관계를 나르시시즘적으로 과도하게 조절함으로써 우리는 타자에 대해 눈과 귀가 완전히 닫힌다. 우리는 같은 것의 디지털 소음 속에서 더 이상 타자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음성과 시선에 감염되지 않는다. 디지털 매체들은 타자로서의 상대를 매끄럽게 다듬는다. 가까움과 멂을 무간격으로 대체한다. 디지털 소통은 자음화된 소통이다. 여기에는 비밀도, 수수께끼도, 시도 없다. 이 소통은 간격과 거리가 없는 상태를 위해 멂을 제거한다.

음성은 망령이자 유령(타자의 목소리)이다. 배제되고 억압된 것이 음성이 되어 귀환한다. 억압과 부정의 부정성이 갈수록 허용과 긍정에 밀려나는 사회에서는 갈수록 음성을 듣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 대신 같은 것의 소음이 더 커진다.

음성에는 탈영토성이 깃들어 있다. 내면 속의 바깥으로부터 오는 음성은, 소크라테스가 들었다고 하는, 도덕적 심급(審級)으로서 경고하는 음성이 이미 데몬(내면의 목소리, 영혼), 즉 섬뜩한 타자로부터 온 것이다.

사유에는 타자를 향한 추구로서의 에로스가 필요하다. 사유는 타자의 부정성에 자신을 내맡기고 미답의 영역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유는 같은 것을 지속시키는 긍정적 조작으로 전락한다. 시는 타자와의 만남과 함께 시작된다. 자기 자신이 말하는 것을 듣는 디지털 반향공간으로부터 점점 더 타자의 음성이 사라지고 있다.

연결&네트워크

관계&만남

시선과 음성이 없음

디지털 소통(탈육체화)

-그것의 관계

기의(한정적, 확정적)

시선과 음성이 있음

몸의 경험

-의 관계

기표의 과잉(무한정적, 미확정적)

 

타자의 언어

세상을 낯선 것으로 지각하지 않는 자는 세상을 전혀 지각하지 않는다. 선험적으로 예술은 인간을 경이로 이끈다. 정신은 본질적으로 비판이다. 디지털 반향공간에서 주관적 정신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만날 뿐이다. 익숙함이 증가할수록 정신을 활성화하는 경이의 잠재력이 모조리 사라진다. 예술의 제자리는 섬뜩한 것 속에 있다. 문학에는 어둠이 내재한다. 어둠은 그 안에 간직되어 있는 낯선 것의 현존을 증언한다. 이름 없는, 무명의 발언자로서 시인은 타자의 이름으로, 전적인 타자의 이름으로 말한다. 예술은 자기초월을 전제한다. 시는 타자를 찾아가고, 타자에게 말을 건다.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시에게는 모든 사물, 모든 인간이 타자의 형상이다.

우리는 이름이 없거나 자신을 망각하는 것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에고가 거주하는 디지털 네트워크는 모든 낯선 것, 모든 섬뜩한 것을 잃어버렸다. 과잉소통은 자신 안에 침묵을 본질적 요소로 지니고 있는 언어를 억압한다. 언어는 정적으로부터 생겨난다. 정적이 없으면 언어는 이미 소음이다. 서로에게 우리는 관심을 얻으려고 싸우는 쇼윈도들이다.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 매체를 통해 타인을 최대한 가까이 내게로 끌어오고자 한다. 그 결과 우리는 더 이상 타자를 갖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는 타자를 소멸시킨다.

 

타자의 생각

자신으로 존재함은 자신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존재하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나는 존재한다는 인식이 강력하게 깨어난다. 죽음은 할 수 있을 수 없음으로, 불가능성 그 자체다. 할 수 있을 수 없음의 이 수동성이 타자에게 접근하는 길을 열어준다. 에로스는 할 수 있음으로는 절대 번역될 수 없는 타자와의 관계다.

무력함은 타자의 시간이 시작되게 한다. 이에 반해 피로는 자아의 시간에서 비롯된다. 나를 나로부터 떼어내어 타자에게 끌고 가는 에로스만이 우울증을 이길 수 있다. 우리와 대립되는 방식으로 살고 활동하고 느낀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기뻐하는 것 말고 무엇이 사랑이겠는가?

이원성이 모두 사라진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융합되어버릴 것이다. 사랑은 세상을 타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창조하고 익숙한 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사랑은 전적으로 다른 것이 시작되게 하는 사건이다.

 

경청하기

무엇보다도 점점 더 에고에 집중하는 것이, 사회가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것이 경청을 어렵게 한다. 나르시스는 요정 에코의 애정이 담긴 음성에, 실로 타자의 음성이라고 해야 할 이 음성에 대답하지 않는다. 그래서 에코의 음성은 자기 음성의 반복으로 전락한다.

타자의 다름을 긍정해야 한다. 경청은 선사하는 것, 주는 것, 선물이다. 경청은 타자가 비로소 말을 시작하도록 돕는다. 경청은 타자가 자유롭게 말하는 공명의 공간이다. 경청자는 판단을 유보하고 손님을 환대함으로써 자신을 비워 타인을 위한 공명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로써 경청의 공간은 에고가 보류된 타자의 공명 공간으로서 열린다.

좋아요의 문화는 모든 형태의 상해(傷害)와 전율을 거부한다. 그러나 모든 상해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자는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한다. 모든 깊은 경험, 모든 깊은 인식에는 상해의 부정성이 내재한다. 단순한 좋아요는 경험의 절대적 소멸 단계다. 상처는 타자를 위한 열린 문이 된다.

타자가 현존하지 않을 때, 소통은 정보들의 가속화된 교환으로 전락한다. 이런 소통은 어떠한 관계도 만들어내지 못하며, 오로지 연결만 낳을 뿐이다. ‘좋아요의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오로지 우리 자신이나 우리와 같은 사람들만 만난다.

경청에는 정치적 차원이 있다. 정치적 공간이란 그 안에서 내가 타인을 만나고, 타인들과 이야기하고, 타인들을 경청하는 공간이다. 경청은 타인들의 현존재에 대한, 그들의 고통에 대한 행동이자 적극적인 참여다.

오늘날에는 각자가 자기 자신, 자신의 고통, 자신의 두려움과 함께 어떤 식으로든 혼자 남아 있다. 고통은 사유화되고 개인화된다. 나의 고통과 너의 고통 사이에 어떠한 연결도 생성되지 않는다. 정치화는 사적인 것을 공적인 것으로 번역한다. 오늘날에는 오히려 공적인 것이 사적인 것으로 해체된다. 공공성은 사적 공간들로 분해된다.

인터넷은 오늘날 공동의 소통 행위 공간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인터넷은 오히려 자아의 전시 공간들로 해체되고, 이 공간들 안에서 사람들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광고한다. 인터넷은 고립화된 자아의 공명 공간일 뿐이다. 광고는 어떠한 경우에도 경청하지 않는다.(기업 최대 윤리인 이익 추구를 위한 일방적 통보. 고객을 현혹해 상품 판매가 목적.)

소란스런 피로사회는 듣지 못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전혀 다른 시간이 시작되게 하는 시간혁명이다. 타자의 시간을 다시 발견해야 한다. 자기 시간의 전면화는 오늘날 모든 생활 영역을 파고들어 인간의 전면적인 착취를 낳고 있는 생산의 전면화와 동시에 진행된다. 신자유주의적 시간 정책은 생산 논리를 벗어나는 고양된 시간인 축제의 시간도 제거한다. 축제는 탈생산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고립화하고 개별화하는 자기 시간과는 반대로 타자의 시간은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타자의 추방』 - 한병철.hwp


『타자의 추방』 - 한병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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