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자나무호박(琥珀)
사흘 겨울이면,
(탱자탱자 놀고 있다는 말은 어릴 적 전라도 어른들에게서 들은 말 향 좋은 노는 탱자라
공자왈맹자왈 말씀 없이도 옛날에는 읍성도 안팎으로 지켰다는데 지금은 해미에 가도 온데간데없던 그가 과천 주택가 담벼락 아래 있는 거라 반갑고 한편 부럽고 하여 출퇴근길에 통성명 없이 눈인사만 주고받던 터라 은행은 꽃 다 진 자리가 몽글몽글해지던 오월 어느 날 오종종하게 이발한 채 건넛집에서 건너 온 송홧가루를 뒤집어 쓴 채였던 거라
꽃이 없지 않은가 그대에게는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 난감한 심사를 낌새챘는지 좀 멀어진 듯했다 늦은 봄가을로 이발을 한 말쑥한 그를 볼 때마다 뵌 적 없는 집주인의 마음 씀씀이를 떠올렸으나 그대에게는 그늘이 있어보였던 거라 다시 오월이 오고 꽃은 여전히 오지 않았으나 빛나는 가시 하나를 아이의 콧잔등에 붙여주고는 그대가 웃자 아이도 따라 웃었던 거라
달빛 햇빛 한 번 제 무릎 아래 다녀간 적 없어 담벼락 아래 제 그늘 한 번 거느리지 못한 거라
그대와 처음 만나던 섣달이 다시 오고 말쑥한 그대 여전했으나 한낮 늙은 호박만한 얼음덩어리를 매달고 있었던 거라 보일러 연통에서 떨어진 물방울들은 꽃이라 하기도 열매라 하기도 뭣했던 거라 그날 밤 몽둥이를 들고 수차례 찬 공기를 매섭게 갈라 쳤으나 틱 텍 턱도 없는 소리만 요란하고 가시로 중무장한 그는 완강히 저항하며 몽둥이를 두 동강 내고는 씩씩거렸던 거라 단단히 벼른 거라 가시에 할퀴며 맨손으로 겨우 훔치듯 떼어낸 덩어리에는 떨어져나간 그의 몸이 고스란히 박혀 있던 거라 겨울이 지나면 얼음은 사라질 테고 더는 누구의 것도 아닐 텐데 집이 생긴 이래 그대는 겨울마다 그래왔던 거라
제 온몸 다 들어갈 시절을 꿈꾼 그대 여전히 제 그림자 하나 거느리지 못하는 그대에게 그 밤에 들은 상종 못할 인간이라는 말
귤이나 까먹으며 탱자탱자 노는 겨울이었고 그대는 밤새 날카로운 이빨을 주렁주렁 세워가며 부러진 몽둥이 노려보던 눈을 내게 돌린 거라 데려갈 것도 아니면서 데려갈 것도 아니면서 무릎 아래 떨어진 호박 한번 힐끗 치어다보고는 밤새운 가시눈을 빤히 흘긴 거라 보일러가 돌아가는 동안 그대 뜨거운 물을 땡땡 얼려 키울 테지만 나는 나의 주인에게 그대의 울화에 대해 기도한 적 없었던 거라 그대에게 주인은 없었던 거라)
누구라도 옴짝달싹 못하게 갇힐 수 있는 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