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및 칼럼

효율성

sihatogak 2022. 3. 29. 11:03

  효율성의 사전적 의미는 "들인 노력과 얻은 결과의 비율이 높은 특성"이다. 어느 개인 어느 사회 어느 정부나 효율성에 사활을 걸어 개인과 사회, 정부의 미래를 계획한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목전에 둔 수험생들은 본인의 진로와 관련한 학습의 효율성을 따져 학습 방법의 효율성을 따진다. 작금의 상황이 된 지 오래인 공교육 붕괴 현상도 이러한 효율성과 무관하지 않다.

  학생들은 개개인의 학습의 효율성을 따져 수업이 본인의 학업성취율 향상과 방향이 맞지 않다면 교과 수업 시간에 자신만의 학습을 자율적으로 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기게 마련이다. 이를 교사가 저지하는 것 자체도 쉽지 않다. 교권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교사 스스로도 본인의 수업이 모든 학생에게 가장 효율적이라고 여기는 이는 없다. 학습이나 정서의 개인 차가 있는 다수의 학생들을 데리고 일관된 수업을 하는 것은 어쩌면 욕심일 수도 있다.

  학교 교육은 태생적으로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구조에 놓여 있다. 공교육은 보편타당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보편타당함이란 들쭉날쭉한 학생들의 편차에 맞추기보다는 기본에서 향상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선 학생은 어떤 측면에서 앞서고 있고 뒤처진 학생은 어떤 측면에서 뒤처지는지를 보는 것 또한 교실에서 학생들이 배워야 할 공부의 핵심이다. 잘하는 지점은 알리고 잘못하는 지점은 변화를 요구하는 게 교육의 본질이기도 하다.

  팬데믹 시대를 3년째 살아가는 현실은 효율성의 문제를 더욱 극대화시켜 학교 현장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학생들 중 몇몇은 체험학습과 가정학습을 이용해 등교를 하지 않고 자신의 학업 효율성의 극대화를 노리기 위한 방편으로 삼고 있다. 나아가 방역지침의 헛점을 이용해 유증상으로 인한 인정 결석을 하는 학생도 늘고 있는 실정이다.

  물은 흘러 바다에 닿는다. 그 여정 중에 물도 효율성을 찾을 것이다. 샛강에서의 효율과 한강에서의 효율, 서해와 태평양에서의 효율이 저마다 조금씩은 다른 양상을 보일 것이다. 학생들도 12년간의 공교육을 마치고 대학에 진학하여 전공을 학습한 뒤 진로를 모색할 것이다. 다양한 진로를 선택하여 사회에 진출한 개개인들의 삶의 양상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여전히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노력들은 할 것이다. 효율성의 잣대가 물론 서로 다르겠지만 말이다.

  자신만의 학습 효율성을 찾아 등교를 거부한 학생이 있다고 치자, 그 학생은 단기간에 효율성을 극대화하여 본인이 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극대화시킨 효율성 덕분에. 하지만 그 효율성이란 것의 반작용 또한 분명 존재한다. 어느 조직의 효율성을 위해서는 어느 한 구성원의 배재가 필요악이 되는 지점도 발생한다. 한 학생이 자신의 효율성을 위해 취사선택을 하는 상황처럼 조직 또한 마찬가지의 상황에 언젠가 맞닥뜨리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나의 손해가 장기적으로 효율적일 수도 있음을 우리는 쉽게 간과하고 만다. 조직 또한 마찬가지이다. 낙오된 병사를 효율성만 따져 전방에 남겨 두고 온다면 그 부대는 전우애가 사라지게 되어 사기가 떨어지게 될 것이다. 결국 전투나 전쟁에서 크게 패하는 상황에 이르게 될 수도 있다. 다만, 어느 순간 어느 조직에서도 효율성의 극대화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문제가 될 리 없겠지만, 그러한 인간은 드물다. 학교에서의 배움이라는 것이 학업성취도 향상만을 다루는 것도 결코 아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선택의 반대말은 포기이다. 때로는 일 보 전진을 위해 이 보 후퇴가 필요할 때도 있다. 빨리빨리 문화가 대한민국을 오늘에 이르게 한 부분도 있지만, 그로 인한 우리 사회에 불거진 갈등 양상도 살펴야 할 때이다. 효율성의 진정한 효율을 생각해 볼 때에 이른 것이다. 이해득실만을 따지다 보면 이해득실만을 따지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 효율성의 문제 또한 교육의 문제임이 분명하고, 교육이 바로 서야 세상이 바로 설 수 있다는 점을 교사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모든 구성원들이 합의하고 실천하였으면 한다.

  네가 찾고 있는 것이 너를 찾고 있다는 말이 있다. 자신이 간절히 찾고 있는 것이 훌륭한 작품이라고 한다면, 그 멋진 작품 또한 멋진 작가를 찾아 헤매고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의 효율성은 당장의 이해득실을 말함이 아니다. 열정을 품고 시간과 노력을 바쳐 작품에 몰두한다면 그 작품이 그 작가에게 찾아오게 마련일 것이다. 자신이 찾고자 하는 것을 찾을 수 있는 사회는 각자가 노력해야함을 필자 스스로도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