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률詩

서른아홉의 자화상

sihatogak 2008. 6. 17. 09:24
 

서른아홉의 자화상


  일군의 군인들이 건물로 올라간다 수색 중이다 건물은 오래된 오층의 아파트다 건물의 공간이란 공간은 모두 수색한다 각호의 문은 잠겨 있다 소총으로 잠금장치를 갈긴다 군홧발로 문을 밀친다 그리고 각 방마다의 공간을 향해 총을 쏘아댄다 적이 은폐할만한 공간마다 총알을 퍼붓는다 아군의 행렬은 어느 순간 이어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쏘아대는 소총 소리는 계속 이어진다 행여 잡혀 있을 아군을 구하기 위해 샅샅이 수색한다


  일군의 군인들은 지하 벙커로 들어간다 지하 벙커는 끝없는 미로다 적들의 잔당이 간혹 출몰한다 하지만 총알세례 앞에 무기력하다 적이 아닌 어떤 깡마르고 왜소한 사내를 따라 간다 사내는 지하 벙커와 이어지는 굴로 들어간다 거기서 원숭이 여자와 갓 난 것을 두고 살고 있다 그러느라 집을 나갔던 것이다 그 원숭이 여자는 사내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사내는 군인이 아니다


  어느새 아파트 옥상에 다다른다 옥상을 끼고 돌다보니 꺼림칙한 공간이 나온다 그 공간에서 적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 공간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콘크리트는 견고하게 막음질 되어 있다 총알이 튕겨 나간다 갑자기 둔탁한 콘크리트 벽면이 회전문 돌듯이 열린다 아군들이 적군에게 잡혀 있다 방아쇠를 당겨도 총알은 나가지 않는다 적군들의 왕성한 활동을 보기는 처음이다 한데 엉긴 적군들은 상반신은 개체이지만 하반신은 한몸이다 그들은 서로의 몸으로 흘러들면서 진가를 발휘한다 잡힌 아군들의 몸까지 그들의 몸으로 만들면서 그 공간에서 흘러내린다 아군 하나가 지원병을 부르러 간다 지원병은 가까이에 있다


  그 사이 아군 몇몇은 적군의 흘러내림에 동화되어간다 적군은 부서지면서 강해진다 개머리판으로 적군의 두개골을 내리친다 세로로 두 동강이 나도 죽지 않고 그들은 흘러내린다 그들의 공격은 흘러내려 아군을 그들의 몸으로 만드는 것이다 아군은 끝까지 싸운다 잡힌 아군들이 고통스럽게 적군에게 녹고 있다 아군의 육체가 적군의 동력이 된다 적군의 숫자는 많아진다 그리고 강력해진다 그러나 원래 잡힌 아군들 말고는 그 누구도 소리를 지르거나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 모두 용감하다


  아군의 지원병이 오면서 적군을 향해 총을 쏘아댄다 그들의 흘러내리는 육체는 새로운 에너지로 인해 총알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그들은 뭉쳐 강력해진다 그들이 낡은 아파트의 공간을 따라 차고 흐르기 시작한다 아군의 전사자가 늘수록 적군의 흘러내림이 거세진다 이제 형태조차 없이 끈적한 액체의 흐름이 된다 적군과 아군의 형체도 없고 소총도 없고 기분 나쁜 흐름만 강렬하게 천천히 흐르고 있다 그 흐름을 수많은 아군들이 저지하기 위해 총알을 퍼부어댄다 아군의 병력은 실로 거대하다 그 도시의 낡은 아파트에서 흘러나오는 적군 말고는 온도시가 아군들로 들끓고 있다 그들은 두려움이 전혀 없어 보인다 그 수많은 아군들이 적군의 흘러내림의 소식을 접한다


  그 순간 아군들의 얼굴을 본다 모두 내 얼굴이다 용감하던 내가 갑자기 심약해진다 흘러내림 가운데 언뜻 비치는 적군의 얼굴을 본다 내 얼굴이다 피아의 구분이 불가능하다 싸움터 한가운데를 지난다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한다 철모 안쪽에서 가족사진을 꺼낸다 낯선 원숭이들만 가득하다 언제든 마지막이 될 수 있다 흘러내리는 시간을 잘라본다 끝과 시작의 단면을 찾을 수 없다 싸움터 한가운데를 지나며 양팔을 머리 위로 올린 채 깍지를 끼고 운다 현재는 맞물려 있다